장애 정도가 심하거나 병원과의 접근성이 쉽지 않은 환우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위해 한국혈우재단에서는

지난 2013년부터 가정방문 간호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가정방문 간호사업 시행 첫 해, 재단에서는 오랜 경력과

간단한 시술 능력, 전문적인 간호학 지식을 갖춘 자들을 대상으로 가정방문간호사를 채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본인은 재단의원에 내원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정방문간호사 선생님이었던 구종례, 정영혜 선생님의 친절한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두 선생님은 언제나 친절한 미소로 가정간호사업을 열심히 홍보하셨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가정간호사업이 그다지 마음에도 와 닿지 않았다. 내 나이 20대가 넘도록 열악한 형편과

치료 여건 탓에 제대로 된 치료나 진단도 받아보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몸 구석구석은 출혈의 흔적과 신체적인

변형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비관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홀로 고통받는 외톨이’라는

피해망상적인 성격이 형성된 탓인지 당시에는 가정간호 선생님들의 홍보를 무심히 외면하였다.

그러다 2013년 9월 중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밤. 갑자기 오른쪽 무릎에 엄청난 통증이 찾아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밤을 설치다 보니, 몸 상태는 계속 악화되어만 갔고, 급기야 심한 빈혈까지 겹쳐

화장실 출입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침상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누워만 있자니, 몇 해 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던 오른쪽 무릎에 시커먼

먹피 혈종이 생기고 급기야 부풀어 오르는 게 아닌가! 오랜 세월 몸에 밴 무딘 감정과 무의식을 위세 부리듯,

청맹과니처럼 어리석고 미련스럽게 치료시기를 방임한 결과였다.

허나 돌기되어 있는 상처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던 중

그만 실수로 상처 부위를 건드렸더니, 시커먼 먹피와 진물이 흡사 갑오징어가 먹물 뿜듯 온통 화장실 바닥을

적셨다. 이미 무기력과 의기소침, 의욕상실과 자포자기에 빠진 내가 임시방편으로 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비위생적인 두루마리 화장지로 대충 상처 부위를 싸매 놓는 게 전부였다.

이렇듯 어리석게 치료시기를 놓쳐 버리고 시간을 허송하다 결국 재단 사무국의 우종완씨에게 전화를 걸어

가정방문간호를 요청했다. 고맙게도 바로 다음 날, 우종완씨와 구종례 간호사 선생님이 재단의원 원장님의

처방약과 비상약품을 챙겨와 주사를 투약하고 소독하여 주었다. 그동안 무릎 염증을 방치한 채 보냈던 날들과

볼품없는 몰골, 서글픔의 무게를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가정간호 선생님들께서는 나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셨던 것 같다. 최용묵 이사님, 유기영 원장님,

주상춘 간호차장님께서는 나의 상태를 수수방관할 게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강동경희대병원에 사전 예약을

하셔서 입원 수속 없이 오른쪽 무릎 염증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혈우재단의 가정방문 복지사업은

타고난 유전병의 고통과 질곡, 혹독한 멍에와 굴레 속에서 혼자서 아픔을 버티고 견뎌야 했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줬다. 나아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구심점의 본류’임을 재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왕 지면을 할애한 김에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련다. 이따금 재단의원 진료대기실에서 어린 환우와 젊은 엄마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그들을 마주할 때면 나의 젊은 날이 오버랩되어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이제 내 나이도 어느덧 육십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날의 수많은 죽을 고비의 사경 속에서 심란하고 지난한 세월의 궤적들이 스멀스멀 떠오를라 치면 몸소리

쳐지는 한순간의 악몽이었음 싶지만, 이 또한 엄연한 내 삶의 역사요, 숙명과 같은 기억이기에 간단히 어린

시절의 소화를 첨언하고자 한다.

1966년 초봄의 어느 날, 나는 한산한 선창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해가 저물도록 놀다가 저녁밥을 먹고선 잠에

빠졌다. 새벽녘에 아침밥을 지으시던 어머님은 코피를 ‘콸콸’ 쏟은 어린 아들의 붉은 두 뺨과 피범벅이 되어 있는

이부자리를 목도 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는 수십리 떨어져 있는 병원을 향해 달리셨다. 그 시절 마땅한

교통수단이나 구급차도 없었지만 오직 어린 자식을 살려내야 한다는 초인적인 일념 하나로 쉬지도 않고 달려

고갯마루를 넘어가셨다. 그 작고 가냘픈 몸으로.

동이 틀 무렵, 피투성이 아들을 가까스로 병원 침대에 뉘인 후 의사선생님을 애타게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뒷모습.

등 돌아 흐느끼시던 그 뒷모습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어머니의 축 늘어진 어깨와 등줄기엔 땀과 어린 자식의 피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병을 반드시 고쳐주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입소문,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셨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약제를 구해오셨고, 매일 합장기도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몬도가네’식

민간요법이지만, 어머님은 아들을 병마에서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감당할 의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어머니는 이제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계신다.

새삼스럽게 옛날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예고 없이 발생하는 출혈을 상시 대비하며

어린 자녀를 지켜야 하는 젊은 부모들을 생각해서이다. 자가주사와 유지요법도 좋지만 재단에서 가정간호를 보다

정례화 하여 환자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한다면 부모님들의 자책감과 부담감, 스트레스를 더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애정 어린 바람이 있다면 환우 보호자들이나 청장년층 다수가 자신의 현실과 앞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자격지심에 빠져 이성교제와 결혼을 포기하고 있다. 그들은 삶에 회의적이고 자존감을

상실했다. 혈우재단 관계자분들께서 이들을 위해 전문 심리치료사나 정신과 전문의를 통해 힐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셨으면 한다.

한국혈우재단에서 운영중인 가정방문 간호사업 수혜자의 한 사람으로서 김은경, 박선희 두 가정방문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한다. 소수의 인원과 자원으로 전국을 순회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 소임을

다 하시고 계심에 아낌없는 찬사를 드린다. 오늘도 내일도 여념 없이 가정방문간호사 선생님들과 목적지까지

장거리 안전운전으로 이동하시는 혈우재단 소속 임직원 여러분에게도 보람된 수고임을 귀띔해 드리고 싶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혈우재단 소속 의료진 선생님들과 사무국 임직원분들, 그리고 전국에

있는 모든 환우들이 이해와 배려, 따뜻한 시선으로 어우러져 함께 살아간다면 먼 훗날, 지금 이 순간 또한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로 기억하지 않겠는가!!

[추신]

끝으로 혈우 후배님, 아우님들께 40여년 전 중학교 단체 영화 관람 때 보았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의 명대사를 공유하며 두서없는 졸필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그래요, 비록 먹구름 가득찬 하늘일지라도 먹구름 뒤 눈부신 태양은 쉬지 않고 공전하며 찬란히 비추고 있습니다.

패기 있고 용기 있게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