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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가족 이야기

"혈우가족 이야기"는 혈우재단 재단보 ‘코헴지’에 소개되었던 환우와 가족의 경험담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개인 보호를 위해 일부 글은 익명으로 게시합니다.

[환우 수기]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에 담겨 있는 내 이야기, 내 음악
관리자 ㅣ 2018-02-07 14:27 ㅣ 67

인생을 바꿔버린 담 넘기

안녕하십니까. 재단 소식지 코헴지를 통해서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서울에 사는 28살 중증 혈우 환우입니다. 이 글을 계기로 특별하지는 않지만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제가 혈우 환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야기하기 조금 민망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제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포경수술을 받게 하셨다고 합니다. 남자아이로 태어난 만큼 어차피 조금 더

자라서 고통스럽게 포경수술을 받을 바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일 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술 과정에서 유독 출혈이 많고 지혈이 잘 안 된 것입니다. 하도 이상하여

검사를 받아보았고 그 결과 혈우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렸었던 그때 병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학창시절은 여느 환우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출혈 탓에 학교에 결석하는 날이 많았고,

주사 맞기는 싫어했고, 남들과는 다른 생활에 왜 나는 이렇게 지내야 하나라는 생각에 반발심도 가졌던 것 같습

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여전히 부모님 속 깨나 썩히는 아들이지만 학창시절 때가 최고로 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의 마지막 날, 시험지를 채점하고 그날따라 친구들과 놀다가 학교를 늦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학교 경비아저씨가 정문을 제외한 모든 문을 다 잠가버렸을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저와 친구들은 집에 가기 위하여 학교 담을 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멀리 돌아서 나가면 굳이 담을

넘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게 귀찮아서 담 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이 제 인생을 바꿔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먼저 담을 뛰어 넘었는데 제 뒤에서 담을 넘던 친구가 넘어져서 제 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몸무게가 꽤 많이 나가는 거구였는데 그 충격으로 인하여 저의 왼쪽 발목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발목에 핀을 박고 6개월 동안 목발 신세를 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하여 제 삶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장애 6급 판정을 받아서 장애인 특별전형으로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당시 회복하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조심성도 많이 생겼고 건강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애 판정을 받은 것이 오히려 진로에 있어 도움을 받은 부분도 많았고 늘 범사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장애인 분들의 권익보호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혈우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장애가 있다고 하여 손가락질을 받거나 모욕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의 어려운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힘들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한 친구들에게 주사맞는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주기도 하고 혈우병이 어떤 질환이고

응급상황에서는 어떠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등을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제 사춘기 시절이 이 계기를

통해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삐딱했던 마음가짐과 생각들을 바로 잡아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

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악프로듀서의 분주한 일상

현재 저는 음악프로듀서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여러 음악을 들려주셨는데

그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은 음악을 듣다가 이 곡에는 이 악기가 들어갔어도 멋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음악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커졌고

음악가를 꿈꾸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 들어가 전자음악을 전공하고 현재는 학교를

졸업하여 한 음악프로덕션에서 대중음악 디렉터 겸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작곡가나 작사가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요즘에는 작사/작곡/편곡 등 분야를 굳이 나누지 않고

다양하게 창작하는 작가들이 많아 프로듀서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제 직업이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프리랜서라 개인시간도 많은 편이지만 한창 일이 몰리는

시즌에는 개인생활이라는 게 없을 만큼 매우 바쁩니다. 또한 근무도 힘들고 수입도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게

단점입니다. 오랜 시간 앉아서 작업을 해야 하고, 식사시간과 수면시간도 불규칙하며, 운동량도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출혈이 발생하고 각종 질병에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틈틈이 수영이나 걷기 운동, 스트레칭 등을 함과

함께 달력에 체크를 해가며 유지요법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혈우 환우로서 최악의 생활패턴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무시간과

휴식시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태해질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2018년 새해 들어서는 한 살 더 먹은 만큼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보려 하는데, 음악은 제 입맛대로 만들면서도 인생은 왜 제 마음처럼 잘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힘들게 완성한 음악들이 하나 둘씩 발매될 때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이 큽니다. 최근에는 가수

인피니트 멤버 동우의 노래 <T.G.I.F>EXID 멤버 혜린의 <서툰 이별>이 발매되었고 곧 발매될

유명 힙합 레이블 AOMG의 솔로가수 ELO의 앨범도 학교 동기들과 같이 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god 출신 가수

김태우, 마마무의 솔라, 세븐틴의 우지, 양다일, 칸토 등등과도 작업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가끔씩 흘러나오는

제 노래들을 듣거나 아는 사람들의 플레이리스트에 제가 작업한 노래가 있다는 걸 확인할 때면 그래도 음악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 관리를 잘 하자

끝으로 제 또래, 청소년 환우들에게 유지요법과 관절관리에 소홀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즘엔 좋은 치료제도 많이 있고 수술과 치료 수준도 좋아졌으니 잘만 관리하면 큰일 없이 지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관리를 잘하셔서 저처럼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평소에 관리를 잘 할 걸이라고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 없이 지내는 방법은 예방과 철저한 자기관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때부터 아프고 힘들어 하였던 저를 보시며 저보다 더 마음 아파하셨을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늘 감사한 마음 갖고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더욱 건강하고

멋지게 살겠다는 약속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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