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이 대학진학을 하기 위해 은회색 캐리어를 밀고 집을 떠나던 날, 막내녀석이 초등학교 2학년의 첫날을 위해

새 신을 신고 등교를 하던 날, 그러니까, 겨울의 깊어지고 마른 주름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하던 3월 3일.

저는 강동경희대학병원 수술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오른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크고 작은 수술의 흔적들이 낡은 몸 이곳저곳에 문신처럼 남아있던 터였지만, 크든 작든 수술이란 언제나

호러영화의 인트로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가장 먼저 잠식당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여, 여하간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제 안의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늘 그랬듯 가족들과

친구들의 응원을 애써 마음에 담아 두어야 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난 후, 서너 시간의 혼곤한 피로를 제외하면 수술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흡족했습니다. 수술을 받기 전, 거의 3년 동안을 통증으로 인해 새벽마다 어김없이 깨어나, 어둠을 등지고

홀로 통증을 다스려야 했던 지난 시간들이 불쾌한 꿈의 끝자락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숙면의 달콤함은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카페라떼보다 더 황홀하고 행복했습니다.

2주간의 병원살이를 마치고 퇴원을 했습니다. 수술보다 재활의 중요성이 더욱 요구되는 인공관절수술의 특성상

집으로 곧장 돌아오는 것은 무리라 여겨 혈우재단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고 곧장 서울 서초동에 있는

코헴의 집에 입소했습니다. 사실 코헴의 집에 입소하는 것을 두고 조금도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낯선 이들과 더불어 한달여를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낯가림이 심한 저의 성정상 흔쾌히 결정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기우’(杞憂). 말하자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을, 우리는 기우라 말하곤

합니다. 코헴의 집과 재단의원에서의 한 달이 그랬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친절했으며, 친절의 결과는

짐작하는 것처럼 대만족이었습니다.

재활을 하는 동안 동병상련의 관계란 경우에 따라서는 혈육을 넘어서는 동감 또는 공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함께 코헴의 집에 머물던 환우들에게서, 재단의원 물리치료실에서 새삼 그 힘을

경험했습니다. 두고두고 감사할 이름들을 마음 깊이 메모하게 만든 한 달은 공감과 헌신의 결과가 때때로

살아갈 힘과 응원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집을 나설 때 입었던 겨울 외투가 무겁게 여겨지고 거리에 벚꽃이 흩날리기 시작하던 즈음, 수술 전 30° 정도에서

경직되어 있던 무릎이 5°에서(펴기) 90°(굽히기)까지 각도가 나올 정도로 몰라보게 호전되었습니다.

이 모든 게 재단 물리치료실 권세진 실장님과 김종선 과장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치료해주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코헴의 집 어머니의 잊을 수 없는 식탁과 재단의원 원장님, 간호사님들, 사무국 직원분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는 것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바람 없는 저녁을 허투루 낭비하는 게 아까워 아내와 가볍게 배드민턴을 치고 막내녀석과도 캐치볼을

즐겼습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권세진 실장님이 이 말을 들으신다면 당장 몇 마디 면박과 함께 꾸짖을 거라

짐작하지만, 지금 현재 저의 무릎 상태가 이 정도로 좋아졌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굳이 밝힙니다.ㅎㅎㅎ

끝으로 들려드릴 수 있다면 들려드리고 싶으나, 그럴 수 없으니 마음의 일단을 고스란히 고백하는 듯한 노래

한소절을 인사를 대신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나는 오늘도 그대가 건네준 이 온기를 신고서

그 어떤 슬픔도 그 어떤 눈물도 넉넉히 견뎌 걸어간다.

'매일의 고백' 중에서 / 강아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