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아이에서 외향적인 대학생으로

안녕하세요? 저는 7살 터울의 두 공주님을 모시기 위해 슈퍼맨이 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이제 곧 40대가 될 환우입니다. 글재주가 없지만, 제 경험이 여러 환우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몇 글자 적어 봅니다.

어린 시절 학교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출혈이 있을 때마다 바로 병원에

입원시키셨습니다. 덕분에 몸이 더 심각하게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단, 1년에 한두 번씩 한달 정도 입원을 하고 나면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어려워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날밤을

새어가며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늘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학창시절 저는 내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별달리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제가 혈우병 환우라는 게 알려져 있었지만, 몇몇 스트레스를 주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크게 개의치 않고

생활하였습니다. 고3시절에 의도치 않게 싸움에 휘말리게 되어 병원생활을 오래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뒤로

성적은 갑작스럽게 바닥을 치게 되었고, 재수와 삼수를 거친 끝에, 어렵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어보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학과대표, 학생회장 등 리더의

자리와 여러가지 동아리 활동을 하며 활발한 교우관계를 맺었습니다.

성격이 바뀌어서인지 모르겠으나, 대학에 들어간 다음부터 출혈로 입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가 혈우 환우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병력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려받고, 기회를 더 많이 갖고, 동정을 받는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들보다 불편한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성취하였을 때 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아내와의 첫 만남

졸업 무렵 첫 직장으로 병원 인사과에 들어갈지, 보험회사 심사팀에 들어갈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한 끝에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직장의 동갑내기 친구로부터 사촌동생(현재의 와이프)을 소개받아 처음 대면하던 날, 나중에 서로에게

밝힌 얘기이지만, 사실 서로에게 호감을 갖지는 못하였습니다. 물론 외모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상형의 차이였다는 것을 밝힙니다. ^^;;

여하튼 첫 만남 이후 서로가 의무감(?)에 연락을 몇 번 하였고, 연락을 할 때마다 처음에 알지 못한 좋은 면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어느 정도 마음을 갖고 사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귐과 동시에 저에게는

크나큰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혈우병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이해를

시켜줘야 할지였습니다.

사귄 지 얼마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고, 저녁에 술한잔의 기운을 빌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불편함에 대해 얘기를 하였습니다. 와이프는 처음에는 많이 놀라는 눈치였으나, 큰 내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저는 자연스럽게 혈우병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사 맞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결혼을 결심한 무렵 또 하나의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바로 처가에 혈우병을 말씀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중 와이프가 집에는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어떤 것이 적절한 판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와이프의 의사를 받아들여 처가집에는 얘기하지 않고 결혼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혈우병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는 환우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사결정을 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배려와 존중이 중요해, 아이가 주는 기쁨

결혼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생활환경이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이 만나 한집에 같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서로가 더 배려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축복 속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임신 개월 수가 어느 정도 찼을 무렵, 우리는 아이가 공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향후 보인자가 될 수도 있어서 근심이 많았으나, 미래 의료기술에 대한 장미빛 희망을 걸고 긍정적인 앞날만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이가 생긴 후 가정의 행복은 둘만의 결혼생활보다 더 값지고 고귀해졌습니다. 요즘 여러가지 사회현상으로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자녀없이 둘만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아이를 키우는 것을 적극 추천해드립니다.

아이가 자라 유치원을 졸업할 즈음에는 외동딸로서 외로움이 클 것 같다는 걱정에 저희 부부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둘째 공주님을 낳았습니다. 현재 둘째는 생후 5개월로 무럭무럭 잘 크고 있습니다.

첫 아이 때는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기쁨을 느끼면서 가정의 행복은 더욱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환우분들께 몇 가지 조언을 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마음의 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활동적인 생활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활동이 출혈빈도를 현저하게 낮출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둘째, 젊을수록 많은 경험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젊어서의 경험들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인생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에 대한 비용도 커지고 시간적 제약도 따릅니다. 지금 당장 결심하고, 행동하고,

느끼십시오.

셋째, 대학생활 이후 진로, 취업, 결혼 등 중요한 사항은 부모님께 의존하지 않고 직접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넷째, 연애와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병은 불편함일 뿐 연애나 결혼을

하는 데 제약은 아니라고 봅니다. 연애도 많이 해보고 나를 정말 이해해줄 만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확신이 드는

배우자를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다섯째, 결혼을 하고 나면 아이를 꼭 가지십시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부모님에 대한 공경과 감사함도 알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기억에 남는 행복한 여름휴가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