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Von Willebrand Disease(폰 빌레브란트병) Type 2-A 해당하는 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우입니다. 가족 중에는 아버지와 고모님, 남동생 그리고 딸이 가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해드리자면, 저는 대학 졸업 후 IT회사에 들어가서 10년 정도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영업과 마케팅 업무를 했습니다. 이후 퇴사한 뒤로는 수년간 뉴질랜드 중동 등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을 돕는

일들을 하다가 얼마 전 우리나라로 귀국해서 살고 있습니다. 현재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몽골과 러시아 출신

외국인들을 돕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코피가 자주 나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10시간 이상 코피가 멈추지 않아 위험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의료기술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서는

제가 단지 피린계 약물에 반응하는 특이체질이라고만 진단했습니다. 또한 그때만 해도 아스피린을

감기약으로도 복용했었는데, 아스피린을 복용한 후에는 출혈량이 많아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아스피린 성분이

제 혈관을 확장시켜 피가 조금 더 많이 나게끔 만드는 것이라고만 말했습니다.

저는 막연하게 그 말들을 믿었습니다.

하도 코피가 자주 나서 학교에서 소풍도 못가고 체육수업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앉아 있던 적도 많았습니다.

코피가 자주 나는 것 말고는 멀쩡한데 장애인 친구들과 같이 교실에 있으려니 속상했습니다.

음, 사실 출혈과 관련된 일들 외에는 어린 시절 기억들이 잘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이후부터는 코피가 자주 나지는 않았지만 한번 나면 쉽게 멎지 않았습니다.

대학생 때는 복막염으로 수술을 했는데 지혈이 되지 않아서 수술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이때 저희 가족 모두 한양대 혈액종양내과에서 검사를 받아 비로소 제 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폰 빌레브란트.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생소한 병명이었습니다.

치료제로는 보스민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대학생활을 넘으니 결혼이라는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아내에게 제가 갖고 있는 출혈 질환에 대해 이야기하니

아내 집안에서는 결혼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아내가 결단을 해줘 지금 이렇게 오누이의

부모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지나온 삶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대학시절 저는 친구들과 목회를 꿈꿨던 적이 있습니다.

아내 또한 의료 선교에 마음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모두 목회와 선교에 뜻을 두고 있었던 셈이었죠.

그러다 2007년 아내와 함께 해외로 나가 선교와 봉사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해외에서 수년간 신학을 수학한 뒤 중동으로 향했습니다. 중동은 모든 게 쉽지 않았습니다.

건조하고 더웠으며, 물과 음식도 맞지 않았습니다. 동양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특히 건조한 중동 날씨 속에서 딸아이가 코피를 흘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중동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는

마땅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딸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다가 코피가 나 급히 집으로 실려오면

도란사민과 보스민으로 지혈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어려움을 직면하면서도 저희 가족은 중동생활에 적응해갔습니다. 저희 부부와 아이들 모두에게

좋은 친구들과 돕는 손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을 통해 여러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비록 아내가 너무 많은 고생을 하여 먼저 하늘나라로 갔지만, 지금까지 저는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웃을

돕고 사랑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딸아이가 코피가 나기라도 하면 제가 주사를 놓아주곤 합니다.

요즘 혈우재단을 보면 감사함과 함께 ‘왜 내가 어렸을 때는 이런 곳이 없었나’하는 안타까움도 느낍니다.

혈우재단이 출혈 질환자들, 특히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육과 프로그램을 제공해주는 것에 많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돌아보면 코피와 같은 출혈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관련 정보도 부족하고

때로는 의사선생님들도 이것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대응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혈우재단이 저희의 건강과 부족한 부분이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