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살고 있는 환우 엄마입니다. 저희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혈우병 진단을

조금 늦게 받았습니다. 혈우병 진단을 받기까지 약간의 우여곡절도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저희 아이도

다리에 멍이 들어서 동네 소아과에 데려가면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라는 대답만 들었던 터라

저도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5살 되던 해에 넘어진 후 왼쪽 무릎이 심하게 부어올라

MRI까지 찍고 수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응고제제를 맞으면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수술실에서 나온 뒤에도 지혈이 되지 않아 계속 수혈을 하면서 경과를 봤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혈액종양과 교수님이 피검사를 했는데도 혈우병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혈관 조형술을 해보자는 말을 들었고, 그래도 지혈이 되지 않으면 다리를 절단할지도 모른다며 수술 동의서를

받았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인데..

그날 저는 호흡곤란까지 겪으며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습니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습니다. 겁을 잔뜩 먹은 아이에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은

“걱정 마. 엄마가 지켜줄게”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혈관조형술로 지혈은 되었지만 한 달 가까이 다리가 굽어진 상태로 지냈습니다.

재활치료도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재활이라는 이유로 혈우병 환자의 다리를 억지로

접고 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억지스런 운동에 힘들어하는

아이를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혈우병이라는 특수성을 모르고 일반 환자와 같은 재활을 받다보니 붓기도 가라앉지 않았고 고통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때 다리 속에서는 출혈이 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런 시간을 겪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2년간 꾸준히 재활과 수영을 병행한 덕에 절뚝이던 걸음걸이도 조금씩 나아졌고, 정상적으로

보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석원이는 그런 힘든 시간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물리치료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착하고 긍정적인 아들이었습니다. 엄마인 저도 가기 싫어하는 병원을,

단 한 번도 “가기 싫다”는 말 없이 잘 따라와 준 석원이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혈우병, 너무나 길게 돌아온 시간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석원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입학한 지 2주 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밤에 잠들기 전까지도 멀쩡했던 팔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접힌 상태로 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부랴부랴 동네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해본 결과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의사선생님은 팔이 빠졌을 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면서 팔을 맞춰보았지만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삼성병원 소아정형외과에도 가보았고, 잘 본다는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부황치료도 받아봤지만 일시적으로

증상이 호전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습니다. 팔이 다시 심하게 부어오른 날 삼성병원 응급실에

가서 피검사를 하였고, 그 결과 혈우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날 혈우병을 진단하시던 선생님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몹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혈우병입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혈우병을 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혈우재단의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길고 긴 여정을 지나 혈우병 진단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혈우병이라고 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병인 줄로만 알았지 내 아들에게 실제로 닥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진단을 받기까지 워낙 우여곡절을 겪었던 지라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제라도 문제의 원인과 대처법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습니다.

처음 재단의원을 방문했을 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환자와 보호자 모두 편안하게 대해주시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껏 제가 방문했던 병원 중에 가장 친절한 병원 같았습니다.

혈우병에 대한 교육과 응고인자제제를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가 “엄마 나 이제 덜 아파”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감사하면서도 멀리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아이는 재단에 오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재단의원에 있는 자판기로 뽑아먹는 핫초코도

좋아하고, 지하 놀이방에 가는 것도 무척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누나와 동생에게 재단의원에 다녀온 걸

자랑해서 누나와 동생도 가고 싶어할 정도입니다.

<용기를 내어 시작한 자가주사>

그렇게 저와 아이는 조금씩 재단의원과 주사, 물리치료에 적응하였고, 가정에서 유지요법을 하기 위해

주사교육에도 참석했습니다. 자가주사라니. 평소 겁이 많기로 소문난 저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 아이의 엄마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주사교육에 참석했고, 재단의원 간호사 선생님들

앞에서 직접 주사를 놓으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더욱 용기를 내어 집에서도 자가주사를 시작하였고,

처음 6개월 동안은 별 문제없이 주사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분명히 혈관에 주사를 놓은 것 같은데, 바늘은 혈관을 벗어나

번번이 주사에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멘붕’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늦는 날도 많아졌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세 번, 아침 7시 30분에 석원이에게 주사를 놓는데,

어떨 때는 계속 실패하여 9시가 넘어서야 주사에 성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하여

양해를 구합니다. 늦게 아이를 등교시키면 많은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내가 잘한 걸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까지 ‘매주 세 번, 아침마다 꼭 자가요법을 하겠다’는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저와 석원이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유지요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번번이 주사에 실패해도 엄마에게 팔을

내밀어 준 아이에게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긍정적인 아들에게 고마워>

엄마는 겁보인데, 아들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그래서 재단 행사에도 잘 참여하고 있습니다.

치즈체험에도 참여했고, 지난번에는 컵케익 만들기에도 참여했습니다. 우리 아이는 재단행사에 참여하는 걸

정말 좋아해서 행사에 갈 때면 누나와 동생에게 “내 덕분에 같이 할 수 있는 거야”라고 자랑까지 합니다.

언젠가 아이에게 혈우병인 게 억울하지 않냐고 물어봤을 때 “아냐,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주사 맞으면

되고, 엠라크림 바르면 아프지도 않아”라고 씩씩하게 대답해줬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언제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혈우병 아이는 부모가 아무리 노력해도 환우가 아니면 다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주시기 바라고, 많은 분들이 함께하여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재단에 계신 모든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