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가족

오래전 위의 제목으로 어느 기업이 매력적인 감성 마케팅으로 캠페인성 광고를 한 적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 것도 사실이다. 왜? 대부분의 회사와 단체들이 ‘가족’이란 열쇳말로 구성원들을 아우르려 할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미래란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현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건 결코 변명이 아니다.

‘직관적 고백’을 하자면, 전형적인 아둔한 인간인지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사에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살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세상에 크게 뒤쳐질 거라고 염려는 안한다. 아무리 바뀌더라도 합리적인 상식선에서 판단하면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믿어서다. 그런데 그 상식선에서 여러모로 고민해 보아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 몸에서 무엇인가 결여된 육신의 문제였다. 미리 말해 두자면, 나는 내 육체가 내 생각과 한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동의하지 않았다.

열정까지는 아니어도 치열하게 살았다. 과도한 노동과 장시간(12시간)의 품을 파는 일이다 보니 힘들고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니 육체의 반작용으로 11년의 직장생활 중 4번의 이직이 있었고 수없이 많은 결근이 있었다. 아마 이 시기는 생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꾸역꾸역 살아 냈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신체 내부적으로 어떤 출혈과 이상이 있는지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외적으로 무릎과 양 발목의 붓기와 통증, 변형이 일하는데 방해됨만 속상해 했다.

그동안 내 몸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혈우병의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근원적 질문과 함께 치료가 절실했다. 기억에 없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국혈우재단”이란 곳을 알게 되고 2006년 6월 어느 날 공식적으로 혈우병 진단을 받았다.
“병명: 혈우병A. 등록번호 ◯◯◯◯◯”
그날 초여름의 하늘은 높고 파랬다. 재단 의원을 나서면서 눈에 물기가 젖어있음을 알았다. 교대 교정에서 속울음을 삼키고, 땅거미가 내리자 어둠을 풀어헤치며 힘들게 귀가했던 날이 새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 1회 내원하며 약품 수령하는 수고만 했다. 자기 몸의 결정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예의가 없었는지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아무렴 사달이 났다. 그때 나는 내 영혼과 육체가 높은 온도로 앓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삶의 환절기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2009년 설 연휴 퇴근길에 많은 양의 위출혈로 지하철 계단에서 쓰러졌다. 희미한 의식을 부여잡고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위세척과 인자 투여, 수혈 등 응급 처치를 받았다. 한동안 지혈이 안돼 고생했지만 목숨을 부지함으로 설 연휴를 몽땅 쓰고도 며칠 후 퇴원했다. 이 일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곧바로 퇴직을 결심하고 긴 호흡의 쉼을 가졌다. 그 무렵 웅크린 방안에서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봤던 어느 날, 화면에 비친 절의 난간이 어찌나 그립게 다가오던지…. 생의 순환의 의미와 함께 있지도 않은 애잔한 낭만으로 그리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현실은 나와 그리움은 여전이 사이가 소원해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그때쯤 재단 복지사로부터 재단 내 ‘자립사업장’에서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받았다. 6개월을 고민했으니 흔쾌히는 아니지만 결국 공감했다.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가족’을 만나게 됐다. 가족이라는 존재 증명은 이렇다. 우리가 달리 가족을 부를 때, 먹을 식(食)에 입 구(口)를 더해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걸 보면 매일 점심 한 끼(때론 저녁까지도) 정도는 같이 먹음으로 생명연장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함께 나누는 자들끼리의 묘한 연대감이 있다. 또한 쓸쓸해 보일 때, 외로워 보일 때, 힘들어 보일 때 ‘마음 쓰임’이 스며있다.
물론 안다. 각자 살아온 과거가 다르듯 우리는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우리를 이끄는 추억, 혹은 기억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사고가 그렇고 가치관이 감정선이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내가 먼지보다 미약할지 모르지만 어느 날 가족의 소망에 먼지 하나의 부피만큼이 딱 모자랄 때 내 간절함이 ‘또 하나의 가족’에게 보탬이 될 거라 믿을 뿐이다.

나딤 아슬람은 아프카니스탄의 잔혹한 현대사를 다룬 장편소설 “헛된 기다림”에서 “인간의 품격은 가족의 범위를 얼마나 크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일까. 우리는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혈우가족’이고 ‘또 하나의 가족’이다. 가을이 시린 어깨로,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때에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닌 바로 여기 내 곁에 있는, 내 기억 속의 사람들과 함께 하심이 어떻겠는가. 재단 4층 ‘자립사업장’에서의 같이하는 노동은, 시보다 시적이고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하며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철학책보다 심오한 것이 ‘또 하나의 가족’의 세계일 듯하니, 한 번쯤 방문해 볼 일이다. 내가 끌릴 때가 가장 적당한 때이기에…. 더 이상 뭐라 말하는 것은 아마 사족일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보다 주역의 효사에 나오는 석과불식(씨과실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의 뜻을 알게 됐다. 즉, 씨앗은 땅에 심어 새싹으로 키워내고 다시 나무로, 숲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거다. 우리 혈우재단이 혈우가족에게 혈우가족의 구성원들이 어린 세대들에게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