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에서 재단 이사장까지…"치료제도 없는 병, 외면할 수 없었다”

"환자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사회 구성원 역할 위한 지원 필요"

코리헬스로그 : 유지영 기자

“처음에는 치료제가 없다 보니 의료진들조차 혈우병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출혈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혈우병 치료의 불모지였던 1980년대, 그 길에 과감히 뛰어든 인물이 있다. 전남대병원 소아혈액종양학 교수로 출발해 이후 전남대병원장, 대학원장, 대한소아과학회 회장, 대한수혈학회 회장,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 이사장, 한국혈우재단 이사장(2012~2021년)과 한국혈우재단 광주의원 원장까지 맡으며 50년 가까이 환자 곁을 지켜온 황태주 원장이다.

“이미 혈우병 치료제 개발해 치료하는 일본에 충격”

황 원장이 혈우병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공의 시절 처음 환자를 보면서였다. 환자들이 출혈로 인해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거나 장애를 겪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는 반드시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 연수 당시, 이미 혈우병 치료제가 개발돼 환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현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황 원장은 “우리 환자들은 관절 출혈로 장애가 생기거나 뇌출혈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본에서는 혈장에서 추출한 응고인자 제제를 사용하고 있었다”며 “당시 국내에는 혈우병에 대한 관심도 거의 없었고 치료제도 전무하다 보니 단순 수혈이나 혈장 치료, 동결침전제제(Cryoprecipitate) 수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황 원장이 본격적으로 혈우병 치료에 뛰어든 계기는 일본 소아과학회에서 만난 김길영 전 세브란스병원 교수의 제안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드물게 혈우병 환자를 돌보고 있던 김 교수는 일본과 한국의 상황을 비교하며 고민하던 황 원장에게 귀국 후 함께 환자를 진료하자고 제안했고, 그 결과 1987년 대한혈우재활협회가 설립됐다.

협회는 국내 의사들과 협력해 지역별로 환자를 맡아 진료했으며, 환자 교육을 위해 캠프를 열기도 했다. 또한 보건복지부를 여러 차례 방문해 혈우병 환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설명하며 복지 확대와 치료제 확보를 위해 힘썼다.

이후 1980년대 말, GC녹십자가 혈액응고인자 8인자 치료제를 개발하면서 전환점이 찾아왔다. 황 원장은 “녹십자가 치료제를 개발한 뒤, 복지부와 대한적십자 혈액원이 환자등록사업을 시행했고, 등록 환자들에게 무료로 응고인자 제제를 공급했다”며 “이후 건강보험 지원까지 이어지면서 환자들의 치료 환경이 크게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1991년에는 한국혈우재단이 설립돼 환자 관리가 보다 전문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루어졌고, 환자들의 삶의 질도 크게 향상됐다.

“혈우병 진료, 연구 대상 아닌 환자와의 동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 환경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희귀질환 특성상 환자 수가 적고, 치료제 가격이 높아 약을 상시 보유하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다. 이 때문에 대학병원조차 혈우병 환자 진료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광주·전남 지역의 경우, 혈우재단 부설 광주의원과 화순전남대병원 정도만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다.

황 원장은 “병원 입장에서는 비싼 약을 비축하는 게 부담일 수밖에 없다. 같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다른 분야에 투자하는 게 낫기 때문”이라며 “삭감이라도 되면 손해를 감수해야 하니 혈우병 환자 진료를 꺼리게 된다”고 전했다.

또한 “과거에는 약이 없었기에 오히려 연구 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혈우병에 대한 기초 연구가 대부분 규명돼 흥미로운 주제가 부족하다. 그 결과 대학병원에서도 매력이 떨어지는 분야로 여겨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평균 수명 40대에서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현재 혈우병 환자들의 삶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초창기 환자들의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일반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늘어났다. 이는 예방적 응고인자 투여 요법이 정착된 덕분이다.

다만 황 원장은 새로운 치료제 도입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기존 치료제들은 정맥주사 방식이었지만, 최근에는 투약 편리성을 높인 피하주사제가 등장했고, 해외에서는 유전자 치료제까지 개발되고 있다.

황 원장은 “경험이 쌓인 약일수록 안심하고 쓸 수 있다. 의원급 의료기관은 응급상황에 대응할 시설이 부족해 신약 사용에 어려움이 있다”며 “충분히 안전성이 입증돼야 의원급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 원장이 신약에 신중한 이유는 거부감이 아니라,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다. 평생 약을 써야 하는 만큼, 내 가족이 복용한다는 마음으로 꼼꼼히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주·전남 환자들은 황 원장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수십 년간 진료실뿐 아니라 소소한 모임까지 함께하며 삶을 공유했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직접 찾아가 치료와 약을 전달하기도 했다.

“혈우병 환자들이 당당한 사회인이 될 수 있는 환경 마련되길”

황 원장은 이제 혈우병 환자들이 단순히 치료받는 수준을 넘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완전히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지금은 환자들이 정상인과 크게 다르지 않게 생활할 수 있다”며 “혈우병 환자들이 자존감을 갖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래의 의사들에게도 따끔한 당부를 남겼다.

“어제 뉴스를 보고 놀랐다. 초·중·고 학생들에게 의대를 가려는 이유를 물으니, 슈바이처처럼 되고 싶다는 학생도 있었지만 ‘돈을 벌 수 있어서’, ‘평생 직업으로 안정될 것 같아서’라고 답한 학생이 많더라. 그러나 의사를 단순히 돈을 버는 직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힘든 직업이지만 사명감을 갖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출처 : 코리아헬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