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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가족 이야기

"혈우가족 이야기"는 혈우재단 재단보 ‘코헴지’에 소개되었던 환우와 가족의 경험담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개인 보호를 위해 일부 글은 익명으로 게시합니다.

[환우 수기] 혈우병은 변명이 아니야, 자신감을 갖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관리자 ㅣ 2018-04-09 10:02 ㅣ 410

안녕하십니까. 현재 전라남도 목포에서 지내고 있는 8인자 환우입니다. 평소에 재단소식지를 통해 여러가지

사연과 정보로 큰 도움을 받아서 고마운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글 솜씨가 좋지는 않지만 제 글이 환우 여러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1990년에 태어났습니다. 재단이 생겨나기 1년 전에 태어난 덕분인지 저는 혈우병 진단도 빨리 받고

연세가 있으신 환우분들보다 응고인자제제도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고생을 조금

하였습니다. 출혈 때문에 팔, 다리에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는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부모님 덕분에 꼬박꼬박 응고인자를 투여하며 학교에는 출석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아픈데도 학교에 가고, 해야 할 일을 해버릇 하였기 때문인지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성실함과 근성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발목과 팔꿈치가 많이 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발목이

거의 망가졌다는 진단을 받고 관절경수술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많은 환우분들이 저마다 후회되는 시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에게는 이 시기가 정말 후회되는 시기로

남아 있습니다. 만일 이때 수술을 받고 발목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학교에 갔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다리가 계속 좋지 않았었는데 그 흔한 정형외과에 들러 엑스레이만 찍어봤더라면

상태가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후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완벽하지 않은 발을 갖은 채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의 기숙사 생활을

마친 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자취를 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자취생활은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원래 제가 모험심과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데, 그래서 그런지 혼자 산다는

두려움보다는 새로움과 즐거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대학교 학생회와 밴드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틈틈이

과외와 학원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버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1년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

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하면서 저는 혼자 살아가는 용기를 얻었고 시야를 조금 더 넓힐 수

있었습니다.

 

즐거웠던 대학교 생활을 뒤로 하고 어느덧 졸업을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졸업 이후의 삶을 고민하게

되었는데, 곰곰이 제 자신을 돌아보니까 취업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하고

싶은 것위주로만 활동하고 경험을 쌓다보니 취업난을 뚫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저는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원에 가서는 조금 더

차분하게 제 생활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가진 역량이 무엇인지 점검하였고 이를 키워나가면서

취업준비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제 또래의 환우분들 가운데 취업을 놓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취업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조금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였던 2016년 하반기부터 취업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입사하고 싶었던 기업이

많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기업들로만 추리고 추렸는데도 1년간 입사원서를 총 80군데 이상에

제출한 것 같습니다.

이미 경험해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혈우 환우로서 가장 힘들 때는 서류에 혈우병에 대해

기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특히 병역에 관한 사항을 적을 때 혈우병에 대해 노출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입사지원서에 병역사항을 기재하도록 하는데 이때 면제사유에 혈우병이라고 적어도

괜찮을지, 불이익이 없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저 또한 이런 고충을 갖고 입사지원서를 적었는데 꽤나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류전형 결과 12군데 정도의 회사에서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 4곳에서는 최종면접까지 봤습니다.

면접을 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보통 2회에 걸쳐 면접이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1차 면접까지는 회사의 실무담당

자들이 면접관으로 참여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인 인적사항이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1차 때보다 조금 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인사팀장, 이사, 사장 등이 참여하는 최종면접

때는 지원자의 개인적인 인적사항들이 영향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작성한 입사지원서를 기준으로

질문을 하기 때문에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혈우병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혈우병은 중학교 수준의 과학만 배워도 어떠한 병이고 어떠한 원리로 걸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질환입니다.

그런데 혈우병이라는 병명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중압감 때문인지 혈우병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혈우병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무서운 병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혈우병이 치료하기 어려운 질환이기는 하지만 면접관들은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병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제게 혈우병에 대해 질문을 할 때는 의구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처럼 난처한 시선과 질문을 받는 와중에도 저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쉽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이전까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내 입으로 밝혀본

적도 없는 병명을 이야기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대답을 하는 그 순간에는 뒤통수부터 허리 끝까지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결국 최종면접에서 모두 탈락한 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느 인사담당자도 굳이

아플 가능성이 있는 지원자를 뽑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정말 비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몇 달간 좌절에 빠져 있던 중 다리상태를 알아보고자 재단의원에서 하는 정형외과 클리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진료를 보신 유명철 원장님께서 대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취업 때문에 정말 중요한

시기였지만 두 달이면 걸을 수 있다는 말씀에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다리는 엄청나게 아팠고 회복도

잘 안 되었습니다.

수술 후 작년 8월 중순에 환우 쉼터에서 나오자 하반기 공채시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가지 다리를

많이 절뚝거리고 통증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성격인데, 다리가 아파서 지나가는

버스도 못 잡고 자소서를 고작 15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가는 것도 힘들어지니 하루에도 몇 번씩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진통제를 매일 먹으면서 어차피 지나가는 세월인데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취업스터디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지원한 곳에서 면접통보가 날아오면 다시 진통제를 먹고 구두를 신었습니다. 다리가 편치

않아 구두를 신으면 무척이나 아팠지만 그래도 자신감 있게 걸으려 애썼고 웃는 표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

했습니다. 그 결과 총 3군데에 합격을 하였고, 그 중 한 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이 대기업, 공기업 공채를 준비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열심히 하시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혈우병이라서 막연한 두려움, 걱정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을 텐데 그럴 필요 없고, 인터넷

취업카페 같은 곳에 가서 많은 정보를 얻으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입사지원서에 굳이 혈우병인 것을 밝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저도 과연

혈우병이 서류전형에 불이익을 가져오는지 실험해보려는 목적으로 지원한 곳 가운데 절반 정도에는

혈우병이라고 쓰고 나머지에는 안 써봤는데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혹 채용 후에 진행하는

신체검사에서 혈소판 수치를 측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크게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혈우병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따금씩

겪게 되는 좋지 않은 일의 원인을 혈우병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보다는 본인의 실력이나 의지가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발전적일 것 같습니다. 또한 그러한 일이 있으면 가급적 빨리 좌절감을 극복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며 자신감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취업이 다가 아닙니다. 저도 취업은 하였지만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일단 수술한 다리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한 동안 거의 매일 주사를 맞고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은행 창구에서 업무를 볼 때도 신경쓰이는 게 많습니다. 대부분 앉아서 일을 하여서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이미지가 중요한 자리이다 보니 다리에 통증이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쓰이고 지속적으로 몸을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에 매일 진통제를 먹고 이틀에 한 번 응고인자를 투여하고 있습니다.

현재 원하는 곳에서 많은 걸 배우며 일하게 되어 기쁘지만 응고인자 투여를 조금 더 많이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보다 활동량이 많아졌고 통증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 같은 직장인 환우들은

통증이 심하거나 급히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면 병가휴가를 내야하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기 쉬우니

응고인자 처방량이 조금 더 많으면 좋겠습니다. 재단을 비롯하여 관련된 분들께서 정책수립 시 이에 대해 조금 더

의견을 피력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동안 재단과 코헴회에서 항상 받기만 하였는데, 이 글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보답을 한 것 같아 기쁘고,

혹시 취업에 관해 궁금하신 것이나 조언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재단을 통해 제게 연락주시면 알고 있는 선에서

성심성의껏 알려드리겠습니다.

최근 신약, 반감기가 길어진 약 등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모든 환우분들이 그때까지 건강하게 관리를

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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