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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가족 이야기

"혈우가족 이야기"는 혈우재단 재단보 ‘코헴지’에 소개되었던 환우와 가족의 경험담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개인 보호를 위해 일부 글은 익명으로 게시합니다.

[환우 수기] 병을 받아들이고, 재미있는 건 다 해보면서 살자
관리자 ㅣ 2019-12-02 15:00 ㅣ 22

안녕하세요. 저는 안양시에 거주 중인 혈우병B, 중증, 23살 오OO이라고 합니다. 현재 한양대학교 소프트웨어 전공을 휴학 중이며 복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직 젊어서 큼지막한 인생의 의미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조그마한 제 생각들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저는 태어나고 약 100일도 안 돼서 혈우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목욕시켜주시다가 이유도 없이 너무 많은 멍들을 발견하셨고, 그 길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혈우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엄마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들께서 서로 위로하면서, 저를 잘 키우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소홀했던 학창시절 건강관리

저는 사실 학창시절에 건강관리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스무 살 때는 결국, 왼쪽 발목 관절경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의 건강관리 실패에는 개인적인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출혈이 있고 나서 약 1~2시간 안에 주사를 맞는 게 가장 효과가 좋은데 저는 가끔 그 시간을 넘겨서 주사를 맞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벼운 충돌이나, 자연 출혈이 일어났을 때,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독서실에서 몇 시간씩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일어나 보니, 무릎이나 발목이 불편한 경우가 많았고, 바로 주사를 맞았으면, 하룻밤 새에 깔끔하게 나았을 것도 심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출혈 이후에 나타나는 반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기분이 갑자기 안 좋아집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유 없이 기분이 좋지 않다면, 제 몸 상태를 체크해봅니다.

두 번째, 저는 혈우병과 관련해서 주변 상황을 너무 많이 신경 썼습니다. 이 역시 주사를 늦게 맞게 된 이유인데요. 우선 중학교 때까지, 제 혈우병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야 겨우 10명 정도에게 알렸습니다. 혈우병을 이렇게 감추고 살다 보니까, 출혈이 생겼을 때, 다른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주사를 맞을 장소가 없어서,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렸다가 기숙사 방에서 주사를 맞곤 했습니다. 융통성 있게 방을 같이 쓰는 친구들에게는 알렸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혈우병을 감추는 건 어릴 때부터 이 병을 이유로 놀림이나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고등학교 때 처음 혈우병에 대해 말했을 당시, 아무도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믿고 혈우병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어떨까요? 자신의 병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우리 몸을 챙기는 행동일 뿐 아니라 우리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인이 된 이후, 누가 군 면제 사유를 물으면, 혈우병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상대방이 우리의 병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나쁜 인간관계를 정리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시다.

주변 친구들뿐만 아니라, 가정 내의 상황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출혈을 부모님께 알리는 순간부터 우리 집안은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아졌고, 그걸 계기로 누군가가 싸우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잘못이 아닌 이유로, 예를 들면 누군가가 다가와 박아서, 장난으로 때려서, 자연적으로 출혈이 생겼을 때도 혼이 나곤 했는데, 이럴 경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정 내에서도 집안 분위기를 위해서, 그리고 억울해지기 싫어서 아픈 걸 숨기고 주사를 안 맞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늦게 말하면 늦게 말한 만큼 더 아프고, 더 아프면 그만큼 더 혼나고 분위기도 더욱 안 좋아지는데 말입니다. 중학생 때는 너무 어려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자가 주사를 맞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픈 것을 숨기지 마시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자가 주사를 배워보는 걸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스포츠를 너무 좋아했던 것입니다. 초등학생 때는 야구, ·고등학생 때는 축구와 농구를 많이 했습니다. 체육 시간은 물론이고 점심시간에도 나가서 운동을 했고, 가끔은 체육대회 준비를 위해 방과 후에 따로 모여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많이 들으셨다시피, 축구와 농구는 혈우병과 관절에 굉장히 안 좋은 스포츠고, 제가 발목 수술을 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도 안타까운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축구와 농구를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 컴퓨터 게임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이랑 놀기 위해서는 노래방에 가거나 스포츠를 해야 했습니다. 다만 남고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스포츠라면 당연히 축구와 농구였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가끔 재단의원 물리치료실에 있으면, 저보다 어린아이를 두신 어머님, 아버님께서 축구와 농구를 하는 아이한테 한마디 해달라고 저에게 말을 거실 때가 있습니다. 우선 그분들께서 바라시는 건 그러다가 나처럼 된다.”라는 말 같은데, 사실 조금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그 나이 때에 부모님 말씀 안 듣고 축구와 농구를 하는 아이들은 저의 한마디를 통해서, 제가 좋은 예시가 된다고 해도, 제 말을 안 들을 것입니다. 당장 저만해도 축구와 농구를 한 선택에 큰 후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스포츠가 저에게 너무 큰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축구와 농구를 한다고 혼을 내는 대신에, 축구와 농구를 하는 와중에 관절들을 보호할 수 있는 보호대나, 팁들을 알려주시는 게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농구를 할 때는, 돌파보다는 슛을 연습하는 게 다칠 확률이 낮고, 축구를 할 때는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확실히 덜 다친다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지금 양쪽 발목이 다 별로 좋지 않아서 축구와 농구는 평생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에 수영이나 맨몸 운동에 재미를 느끼고 아프지 않을 때마다 운동을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고등학교는 신체가 가장 크게 성장하는 시기 중 하나입니다. 이 시기에 몸이 안 좋아진다면, 전반적인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겠죠? 여러 가지 이유로 다치고 주사를 조금 늦게 맞을 수도 있겠지만, 부모님과 친구들과 함께 노력하여 환우분들이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목표를 향한 준비

저는 2년 정도 휴학을 했었고, 이제 복학을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제 전공을 잘 살려서 인공지능 쪽 공부를 하는 게 목표입니다. 중학생 때부터 수학 교사가 꿈이었지만, 마지막 남은 수시에 합격해서 의도치 않게 소프트웨어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바둑에 관심이 있었기에, 2016년에 나온 알파고 이후부터 인공지능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인공지능 관련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스펙을 쌓아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약에 일이 잘 풀리면, 그때 다시 여기에 글을 쓸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성숙하게 만들어준 나만의 개성

저는 혈우병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 병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이렇게 태어나서 여러모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태어났고, 물론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혈우병은 저에게 있어서 개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병을 가지고 태어나서, 다치기도 많이 다쳐보고 병원 생활, 코헴의 집 생활도 해보면서, 제가 감정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고 성숙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의 과거사들이 합쳐져서 만들어낸 저만의 사고방식과 감성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프지 않으신 분들이 개성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나은 삶의 질을 바탕으로 더욱 멋있게 살고 계시겠죠. 다만, 이 병을 가지고 있는 삶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 병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건 다 해보면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린 환우분들과 어린 환우 부모님들께서도 만약 과거의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이 병을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과거의 일들이 현재의 나쁜 점과 좋은 점을 둘 다 만드는 거니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두 아프지 않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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