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재단 공지사항
혈우뉴스
취업정보
자유게시판
혈우가족 이야기
FAQ

혈우가족 이야기

"혈우가족 이야기"는 혈우재단 재단보 ‘코헴지’에 소개되었던 환우와 가족의 경험담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개인 보호를 위해 일부 글은 익명으로 게시합니다.

[환우 성공 수기] 내가 해냈다 - 정재민 환우 편
관리자 ㅣ 2021-08-13 14:41 ㅣ 532
환우 정재민을 넘어서니 의사 정재민이 되었다.(정재민 환우 편) 코헴지 180(20217/8월호 10~11p게재)

안녕하세요. 대구광역시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재민 환우라고 합니다. 의사라는 제 직업을 말씀드리기보다는 제 꿈을 이루기 위해 겪었던 파란만장한 고난극복기를 말씀드리고자 펜을 잡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90년대 중반, ‘종합병원’이라는 인기 드라마가 방영 되었습니다.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신은경 등이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종합병원 의사의 일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혈우병이라는 악조건을 가진 저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병원에 늘 다녀서 의사들이 매우 고생하며 일하는 직업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의사가 되기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혈우병이 있어도 과연 감당해낼 수 있는 일인지, 물어보고 싶어도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으니까요. 주변에 잘 아는 의사도 없었던데다, 환우면서 의사인 분은 본 적도 없었습니다. 

아무튼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 결과 재수 끝에 의과대학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 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후부터였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수련의,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제가 수련의를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거의 매일 당직이 있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일주일에 한 번 퇴근할 정도였 습니다. 워낙 바쁘게 생활하고 잠잘 시간조차 부족하니 병원에서 일하면서도 정작 아프면 치료를 받을 여유조차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가 주사가 가능한 유전자 재조합 방식의 치료제가 있었기에 어떻게든 혹독한 수련의 시절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일하다가 무릎이 아플 때면 남이 알아챌까 이를 악물고 하루 종일 버티었습니다. 참기 힘들 때는 어머니를 오시라고 해서 차에서 주사를 맞곤 했습니다. 병원 내에서는 약을 보관할 곳도, 스스로 주사를 놓을 곳도 없었으니까요. 

한편, 오랫동안 정신과 전공을 생각하였다가, 수련의 시절 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성형외과 전공의 선배의 강한 권유로 생각지도 않았던 성형외과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음, 성형 외과라니?’ 당초 전공을 정할 때,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과였기에 진로를 바꾸는 것에 대해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 바라본 장점을 꼽아 보았습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수술이 많은 점, 수술 시술과정에서 의사의 육체적인 완력을 덜 필요로 하는 점이 매력적이긴 했습니다. 성형외과에 지원할 무렵까지도, 병원 사람들 대부분 제가 혈우병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보수적인 병원 사회에서 밝혀봤자 불이익만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형외과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과 의국(醫局)에서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혈우병 환우라는 사실을 성형외과 교수님들에게 폭로하며 거세게 따져 물었습니다.

“혈우병 환자를 전공의로 선발하실 겁니까?” 

이에 못 이긴 성형외과 교수진 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저를 추천한 전공의 선배에게 혈우병 환우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추천했냐고 강하게 추궁했습니다. 그 선배는 왜 혈우병이란 걸 숨겼냐고 나무랐습니다.

“저는 숨긴 적 없습니다. 다만 혈우병임을 꼭 밝혀야할 이유가 없으니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 뿐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성형외과에 지원하지 않겠습니다.”
“잘 할 수 있겠나? 정말 해낼 수 있겠어?”
“수련의 때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문에 저를 추천해주셨고요. 저는 기어이 잘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너를 믿으마. 하지만 혈우병 환우임을 알고도 추천한 셈이니까 교수진들의 너를 바라보는 눈들을 꼭 생각해라. 두 배로 잘해야만 할거야.”

라고 저의 다짐을 받았고 교수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형외과에 지원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힘겹게 시작했던 성형외과 수련의 기간 동안 신체적인 한계가 분명했지만 오기와 집념으로 뭉친 저였기에, 기어이 해냈습니다.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를 획득한 후, 펠로우 과정을 거쳐 10년 전 개인병원을 개원했습니다. 어느덧, 대구에서는 알아주는 유명한 병원의 원장이 되었군요. 제가 의과대학에 지원하고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했던 때에 비해서 지금은 혈우병에 대한 치료제와 치료환경이 몰라보게 향상되었고 의사들의 수련수준도 높아졌습니다.

혈우병 환우들 중에서 의사가 되고 싶은 분이 있으시다면 꿈을 이루기 위해 능히 앞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사라는 직업에는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을 하는 임상의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다양한 분야에서 환자들의 치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꿈과 의지를 갖고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된다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개척하며, 환자들에게도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아진 치료환경 덕택에 이제는 혈우 환우라서 안 된다는 제약은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용기를 갖고 도전한다면, 그리고 끈기있게 노력해 나간다면, 혈우 환우 여러분도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PS. 타고난 글재주가 없어서 처음 볼펜을 잡았을 때 과연 한 페이지나 채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다보니 훨씬 길어졌네요. 부족한 글 솜씨지만 진실함이 우러나는 페이지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저의 좌충우돌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을까 합니다.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