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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가족 이야기

"혈우가족 이야기"는 혈우재단 재단보 ‘코헴지’에 소개되었던 환우와 가족의 경험담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개인 보호를 위해 일부 글은 익명으로 게시합니다.

[환우 수기] 낙심하기보다는 서로 힘이 되어주기
관리자 ㅣ 2018-04-09 10:12 ㅣ 390

안녕하십니까. 서울 양천구에 살고 있는 혈우 환우입니다. 근래 들어 매주 재단의원에 다녀가며 출혈을 관리하고

있는데, 우연히 기회가 생겨 이렇게 재단 소식지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 환우들이 계시고,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도 모두 다르니 제 글이 부족해보일 수도 있지만 너른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54년에 태어난 저는 올해로 65살이 되었습니다. 슬하에는 이제 40대에 접어든 아들과 그보다 조금 어린 딸이

있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불리는 요즘에는 이 정도 나이 먹고 어디 가서 나이 많이 먹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뭐하지만, 그래도 매주 재단의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보면 다른 환우들보다는 나이가 꽤 있는 편인 것

같습니다. 종종 저와 연배가 비슷하신 분들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젊은 환우들이 자주 보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저는 혈우병A 중증 환우입니다. 몇 년 전부터 다리가 불편해져서 매주 내원하며 출혈관리에 전념하고 있지만

그 전에는 많은 일들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양복점도 하였다가 식당도 하였다가 세탁소도 해봤습니다.

지면을 통해 구구절절 제가 살아온 모든 이야기들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혈우 환우로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과 느꼈던 것들을 다른 환우분들과 조금이나마 나눠보고자 합니다.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전라남도 벌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도 혈우 환우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재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환우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혈우병이나 출혈질환을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의사선생님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 같은 보통 환우들은 혈우병이라는 병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몸 밖으로 발생하는 출혈 외에는 출혈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근육이나 관절에서

출혈이 나더라도 그저 요즘 뼈가 자주 아픈 것 같다’, ‘요즘 너무 무리했나라고 생각하며 집에서 쉬는 게 관리의

전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황당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저희 세대

환우들이 다른 평범한 시골 아이들처럼 뛰어놀며 자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적 생각을 조금 더 해보면 부모님께서 저를 무척이나 아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저희 집 독자였습니다. 제 형제로는 딸 네 명이 전부였기에 부모님께서는 저를 정말 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가끔씩 몸 이곳 저곳에 멍이든 것을 보시고 많이 가슴 아파하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어렸을 때의 사고우연히 버스에서 혈우병 알게 돼

저는 매우 우연한 기회에 제가 혈우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열 살 때였을까요.

하루는 농사를 짓고 계시던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 위해 논으로 나갔습니다. 서툰 솜씨지만 자주 부모님 일손을

도와드렸기에 별 걱정없이 손에 낫을 쥐고 일을 하였는데 그만 낫에 손가락을 크게 베이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크게 베였는지 손가락이 거의 절단될 정도였습니다. 피는 또 어찌나 많이 나던지, 그때 함께 논에 계시던 분들이

모두 놀란 나머지 뭐라도 하고자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다들 마땅한 방도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분들이 무슨 응급처치법을 알겠습니까.

급한 대로 서둘러서 지혈을 하고 가까운 병원으로 저를 데리고 달려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정말 큰 사고를 당하였지만 다행히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아 손가락이 절단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고는 저희 부모님께 큰 충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논에 나가는 일이 뜸해졌고

부모님께서도 농사는 위험하니 다른 일을 해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갑작스럽게 다른 일을 해보라니. 농사일 말고 다른 일을 하려면 무언가 기술을 배워야 했습니다. 깊이 생각한

끝에 양복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6살이 되던 해에 양복점에 찾아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제가 양복점 일을 돕고 배우며 받은 월급이 당시 돈으로 고작 300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적은

돈이었는데, 그래도 열심히 배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출혈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출혈이

많이 났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일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여하튼 별다른 신체적인 어려움 없이 열심히 일하여

부지런히 돈을 모은 끝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른살 정도 되었을 때, 하루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버스 안에 앉아 신문을 펼쳤는데 우연히 지면에 큰 글씨로 혈우병이라고 적혀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혈우병이 뭐지?’ 라는 생각에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제가 아플 때 나타나는 증상이 혈우병의

증상과 너무나도 비슷하였습니다. ‘, 혹시 내가 혈우병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는 혈우병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혈우병 진단을 받은 이후에는 서울에 계신 혈우 환우, 부모님들과 연락이 닿아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는

하였습니다. 모임에서는 서로 출혈관리 및 건강관리에 대한 정보를 나눴습니다. 필요할 때는 혈우병과 관련된

일을 하는 기관, 정부 부처 등에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모임을 참여하면서 비로소 혈우병에 대해 조금씩

지식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재단도 생기고 좋은 치료제들도 많이 개발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힘을 냅시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정말 다양한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기술을 살려 양복점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 일을 하다가 업종을 바꿔 식당을 차리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세탁소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일이 잘 되는 때가 있으면 잘 풀리지 않는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게 보통 사람들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자녀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는 등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손에서 일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세탁소에서는 대부분 서서 일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선 채로 오랜

시간 일하다 보면 다리가 많이 아파옵니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일하다가 그만 쓰러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대로 계속 일을 하였다가는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지금은 잠시 일을 쉬고 매주 세 번 꼬박꼬박 재단의원에

내원하여 출혈관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혈우 환우, 부모님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 보면 혈우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물론 힘든 부분이 정말 많이 있지만 낙심하기보다는 힘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가끔 성공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성공한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공부 잘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거기서 돈 많이 벌어서 사는 게 과연 성공한 인생일까요. 반대로 좋은 대학,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돈도 없이 부족하게 사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의 성공은 결코 돈이나

직장, 학력과 같은 기준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한 야구감독이 소위 실력이 뛰어나다는 선수와 평범한 선수를 비교해보면 종이 한 쪽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개개인의 삶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 비슷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인생의

결과를 좌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는데)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놓고 심히 좋구나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비록 우리는 혈우 환우지만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

있고 좋은 일이 있을 것이며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어린 환우들과 환우 부모님들은 낙심할 때가 더 많은 것으로 압니다. 물론 낙심할 만한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낙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기분을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서로서로 힘이 되는 말, 응원의 말 등을 해주며 함께 출혈을 관리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부모님들도 자녀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같이 아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혈우병이 있는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엄마의 잘못도, 환우의 잘못도 아닙니다. 사실 좋은 약도 있고, 조금만 시간을

들여서 관리하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오늘날에는 혈우병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긍정적인 말, 힘이 되는 말을 하며 어려움을 함께 이겨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 환우들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곧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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