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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가족 이야기

"혈우가족 이야기"는 혈우재단 재단보 ‘코헴지’에 소개되었던 환우와 가족의 경험담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개인 보호를 위해 일부 글은 익명으로 게시합니다.

[환우 수기] 여유를 갖고 포기하지 않을 것
관리자 ㅣ 2018-07-04 12:06 ㅣ 307

병자가 신음할 때에는 평생 품고 있던 모든 욕심이 전부 사라진다. 오직 회복되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다른 일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다. 그런데 어떤 병자는 병을 앓고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돈과 쌀 등 자질구레한 일을 관장한다. 또한 영리를 도모하는 일이 자신의 오랜 병치레 때문에 기회를 잃지나 않을까 염려한 탓에 울화가 치밀어 간혹 생명을 잃는 자도 있다. 어찌 크게 불쌍한 일이 아니겠는가. - 중략 - 내가 병이 난지 오륙일이 되었는데, 입맛이 없어 음식 맛을 모르겠고 머리가 어질어질해 하루 종일 답답하고 우울하다. 밤이면 수도 없이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어쩔 줄 모른다. 이러한 까닭에 평생에 걸쳐 책을 보던 마음이 무려 반이나 줄어들었다. 그래도 그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없어서 하루에 한 번은 읽고 있지만, 마치 뜬구름이 눈앞을 스쳐가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을유년(1765)십이월 이십사일, 부질없는 마음에 붓을 놀려 쓴다.

- 문장의 온도, 이덕무 지음 [다산북스]

 

안녕하세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의 글 중 병과 마음이라는 단문으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인데 마음이 불안하고 몸이 아플 때 이런 글을 읽고 있으면 치유되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용인시 수지에서 살고 있는 환우입니다. 내년이면 쉰을 바라보기 때문에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향하는 나이입니다.

 

스물아홉에 결혼을 한 저는, 지금은 이십대 딸을 둔 가장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호텔 사무직(Back Office)에서

근무한 지 벌써 이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정상적인 삶 보다는

고통 속에서 살았던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약이 좋아졌고 국가의 지원도 받아서

예전에 비하면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지만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약이 부족하고 비싸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사실 환우들 중에는 당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간염에 걸려 걱정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는데,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간염B, C형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천청벽력 같은 혈우병도 견디기 힘든데

간염까지, 그것도 B형과 C형을 다 가지고 있으니 참 인생 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0년 전에 재단에서 C형 간염 치료를 한 덕분에 C형 바이러스는 검출되지 않지만 B

바이러스 보균자로 지속적인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혈우병 확진을 받은 것은 돌도 되기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후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그때마다

저를 지켜준 건 다름 아닌 어머니였습니다. 다행히 간호사직을 하고 계신 터라 응급한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를

해 주셨기에 그나마 아직까지 관절이 유지되고 있는가봅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출석보다 결석이 많아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1학년에 학업을 포기하고 집에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 당시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다른 삶을 살았을 겁니다. 아마도 게임에 빠져 폐인이 되었거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 나올 법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옵니다. 그때 저는 거의 허무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허송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시집 소개를 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서정윤의 홀로서기

들었습니다. 시를 듣는 순간 내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바로 누나에게 부탁해서(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두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밖으로 나가야 하는 모든 일은 가족에게 부탁했던 때였습니다. 당시 집에만

있다 보니 대인기피증도 생겼습니다) 책을 사다 봤습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 집에서 시집이나 소설책을 보다가

내게 맞는 적성을 찾았습니다. 작가의 길을 가자는 목표가 생기니 자연 마음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마침 그 당시 혈우환우를 알게 되었고 재단에 등록하면서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낙헌이 형과 승택이 형

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독학으로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학원에서 재수생활을 거쳐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들어갔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지금의 회사를 입사하여 결혼까지 하는 동안 즐거움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특히 삼십 대에는

가장으로서 많은 걱정도 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만약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부터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데 직장생활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으로

밤잠을 설친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다 지나고 보니 이덕무의 글처럼 그런 마음이 병을 더 키운 셈이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인 게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운명이 있습니다. 그건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게 때문에

현재를 즐기자는 마음으로 주말이면 계획을 세워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재단에 들러 약을 타는 데 경희사이버대학교와 MOU를 맺었다는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수업료가

무료라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호텔을 전공하지 않아서 경희사이버대

호텔레스토랑경영학과(이하 호경과)에 관심이 갔는데 문학도의 꿈을 버리지 못한 터라 어떤 과를 선택할지

행복한 고민을 했습니다. 우선은 호경과에 다니고 졸업하면 미디어문예창작과(이하 문창과)를 다시 등록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일과 학습을 병행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쪼개면 못할 게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관리일 것입니다. 특히 주사의 주기는 예방과 치료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일주일에 한 번 자가 주사를 맞았는데 사십 대 후반에 들어오니 일주일에 두 번,

3~4일에 한 번을 맞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측 팔꿈치가 고질적으로 출혈이 생겨서 예방요법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방요법이 중요한 이유는 관절이 유지되면 근육이 붙고 근육이 붙으면 출혈빈도가

낮습니다. 즉 선순환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인생은 한 번 살지 두 번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삶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에나 혼자 집에서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나 게임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저 시간에 효율적인 생활(책을 본다거나 여행을 가는 것)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계가 인생이라는 총금액에서 조금씩 소비되는 시간을 표시한다면 아마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한두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건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만 스마트폰 중독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은 물과 같아서 흘러가면 다시 잡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무엇을 하든 내가 하고 있는 현재의 일이

미래에 대한 투자가치가 있는지 생각할 때입니다. 나는 늦었으니 안돼라고 생각하는 환우분이 있다면 주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에서 70대 중반의 학우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올해 대구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에서 수필 부문과 시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분은 시창작 문화센터를

두 군데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직접 손으로 작가들의 글을 필사하고 다시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에 옮긴답니다.

매일 책을 읽고 쓰는 것은 기본이고요.

 

끝으로 환우 중에 장애인증이 있는 분은 취업의 문이 더 가깝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업은 장애인

고용의무가 있습니다. 만약에 호텔에 관심이 있는 환우 분은 관리직(기획, 재무, 총무, 구매, 시설, 홍보)에서

일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전공은 딱히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환우 여러분 혈우병으로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인생을 즐기는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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