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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가족 이야기

"혈우가족 이야기"는 혈우재단 재단보 ‘코헴지’에 소개되었던 환우와 가족의 경험담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개인 보호를 위해 일부 글은 익명으로 게시합니다.

[환우 수기] 기왕 사는 인생, 열심히! 재미있게!
관리자 ㅣ 2020-12-01 09:00 ㅣ 448

안녕하세요. 경기도 화성시에 거주하는 40대 중년의 아저씨입니다. 이렇게 글을 통해 혈우 가족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형의 맹장 수술로 알게 된 병

학창 시절에 저는 남들과 다름없이 초··고등학교까지 건강하게 잘 다녔습니다. 그때는 삐삐를 사용하던 시절이네요.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폰 빌레브란트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저는 형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형이 배가 아프다며 이틀 동안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재수학원에 갔다가 집에 왔는데 어머니께서 형이 입원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형은 맹장 수술을 받았고, 3일 동안 참다 보니 복막염까지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장을 세척하고 봉합까지 했는데, 지혈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언론에 나오긴 하지만 당시에는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서 수술 부위를 다시 열어보면 거즈, 핀셋, 가위 등이 실수로 들어가 있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형도 혹시나 해서 수술 부위를 열어서 확인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폰 빌레브란트병인지도 모르고 열고 봉합하고를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결국에는 피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길로 폰 빌레브란트병 검사가 가능한 한양대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고, 저희 형제는 폰 빌레브란트병을 진단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은 형과 저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형의 딸인 제 조카, 안타깝게도 제 아들, 딸 모두 병이 유전되었습니다.

 

나보다 출혈이 심했던 형

저희 형제는 둘 다 폰 빌레브란트병으로 군면제를 받았습니다. 형은 우리나라에서 폰 빌레브란트병으로 군 면제를 받은 첫 번째 사례이고, 제가 두 번째 사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지역 병무청에서 지혈 속도를 체크하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에는 지혈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서 바늘로 세게 한번, 약간 세게 한번, 약하게 한번 찌른 후 지혈되는 시간을 체크했습니다. 사람이 찌르다 보니 일관성도 없었습니다. 벌써 25년 전의 일이네요.

생각해보면 형은 어렸을 때부터 한번 코피가 나면 2~3시간은 기본으로 나고, 출혈량 또한 상당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피가 멈추지 않아서 부모님께서는 피에 좋다는 여러 가지를 형에게 사 먹이곤 하셨습니다. 형에게 혈액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의학이 발전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멍 자국들도 전형적인 폰 빌레브란트병 증상이었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 찾아온 뇌출혈

지난 2018년까지는 병이 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20183, 원인 모를 기저핵 뇌출혈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날은 회사에서 당직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자에서 왼쪽으로 쓰러져버렸습니다. 저는 바로 119 응급요원에 의해 들것에 실려서 응급실로 직행했습니다. 뇌출혈로 인해서 우측 뇌에 지름 약 4.3cm까지 피가 고였던 것입니다. 만약 폰 빌레브란트병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기저핵은 뇌의 깊은 곳이기 때문에 폰 빌레브란트병인 제가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지혈이 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혈이 심해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글로 다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힘들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20개월 입원을 하고 현재는 통원을 하며 좌측 편마비 재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가끔 폰 빌레브란트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출혈이 외부에서 발생한다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빠르게 대처를 할 수 있겠지만, 제 경우와 같이 뇌에서 발생하면 정말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제 자녀들 모두 병이 유전되어버렸는데, 자라는 동안 아니 평생 별 탈 없이 생활하길 기도할 뿐입니다.

 

불투명한 미래와 힘든 시간

제 직업은 직업훈련교사입니다. NCS(국가직무능력표준) 기준 제과와 제빵, 이론, 실무, 태도 등을 가르치며 파티쉐(남성 지칭), 파티시엘(여성 지칭)을 양성하는 일을 합니다. 한때는 베이커리와 베이커리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병가로 쉬고 있습니다. 언제 회복할 수 있을지, 복직 후에 계속 제과와 제빵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아직은 불투명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아이들을 안을 수도, 함께 쇼핑을 갈 수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에 걸어서 산책도 할 수 없고, 단풍여행도 저에게는 아직 사치일 뿐입니다. 그래도 제 미래를 위해서 재활에 힘쓰고 있습니다.

 

여행을 통해 찾은 나의 길

저는 많은 혈우 환우분들이 혈우라는 질환 때문에 직업에 제한을 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은퇴 후에, 어떤 사람은 치열하게 살던 중, 어떤 사람은 글을 읽다가 이런 일을 찾아 새롭게 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었을 때 많은 경험과 체험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저도 외국 여행을 하던 중에 제게 맞는 일을 찾아냈습니다. 여행 중에 숙식 해결과 비자 연장을 겸해서 게스트하우스 키친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리라고 칭할 것까지도 없었지만 적어도 칼질하는 기술은 제대로 배웠습니다. 양파를 얇게 썰어서 손가락 위에 올려놓으면 지문이 보일 정도까지 썰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요리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짧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공도 아닌 제빵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였고,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베이커리에 취직을 하고나니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편입학을 하였습니다. 더욱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고 다시 취업하였고, 경험을 쌓아서 창업도 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이전, 폐업, NCS 강사 등 여러 환경, 상황을 거쳐 여러 가지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살면서 여러 편의 단막극을 찍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누구나 뜻과 의지가 있다면 그럭저럭 볼만한 한 편의 영화 혹은 책 한 권 남기고 가지 않을까요? 물론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기왕 사는 인생을 열심히 재미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만족감, 성취감, 목표를 이루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누구나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저도 훗날 회복하면 다시금 디저트 카페를 운영하면서 빵을 나누고 베풀며 선한 영향력을 주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때 많은 환우분들도 놀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가 되더라도 꼭 할 테니까 많은 응원과 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며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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