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 환우/희귀질환 극복수기 공모 최우수상작

오늘도 어김없이 8시30분에 초인종이 울리며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출근하셨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아침을 챙기고 출근 준비를 서둘러 사무실로 가는 길. 비록 전동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이 순간 나는 더없이 행복한 사람임을 다시 한 번 느껴본다.

5년 전. 여름이 절정이었을 즈음이었다. 샤워하다 넘어져 그나마 힘들게 걷던 걸음도 못 걷게 됐다. 엎친 데 덮쳤다고 할까. 마음이 무너졌다. 평생 이대로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건가. 혈우병이란 희귀난치병 때문에 수술할 수도 없는데 세상은 어찌 이리 불공평할까. 그렇게 수많은 고통과 싸워야만 했을 때 ‘행복’이란 단어는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게 다치고 아파하기도 하지만 장애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아프다는 것 이상의 큰 고통이었다.

희귀난치성질환 혈우병 중증A와 소아마비 중복장애를 가진 지체장애인인 나는 강원도 홍천 농촌지역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지체장애와 함께 원인도 이름도 모를 병을 앓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이유 없이 매일 몸이 아픈 관계로 학교는 어머니의 등을 빌려 다녀야만 했다. 매일 아들을 등에 업고 다닌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입학하자 병세가 악화됐다. 결국 중학교 3개월이 마지막 학창시절이 됐다. 학업을 향한 집념으로 겨우 한글을 깨우쳤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혈우병 장애인으로서, 외출이란 엄두도 못 내고 집안에서만 생활했다. 양치질을 하다가 잇몸에서 피가 나는 등 일상생활 중 가벼운 상처만 나도 피가 멈출 줄 몰랐다. 강원도에 있는 병원에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희귀난치성질환 혈우병 중증A은 넘어지거나 작은 충격으로도 타박상 등 상처가 생기면 지혈되지 않아, 한번 병원에 가면 수혈 링거를 몇 개씩 맞고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30세가 돼서야 나는 서울에 있는 한 병원에서 내가 앓는 병이 희귀난치성질환 혈우병 중증A란 걸 알았고 혈우병은 피가 응고되지 않는 난치병이다. 일상생활 중 입은 작은 상처도 지혈되지 않는다. 반복적인 출혈로 관절 기능에도 이상이 생겼다. 방황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싶다는 마음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먹었던 칠흑과도 같았던 그 시절, 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고 젊은 나이, 나의 팔, 다리 관절은 차츰 굳어가고 병세는 점점 악화돼 40세가 안 되어 세상과 이별할 것이라 여겼다.

좌절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매번 굳건해지고자 노력하지만 모진 삶의 풍파 속에서 달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게 아파본 적이 있겠지만 장애인들에게 있어 아프다는 것은 익숙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감히 모든 장애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일반화하진 않겠다. 다만 나의 작은 경험을 통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시절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는 각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은 “장애는 단지 불편일 뿐 불가능은 아니다.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조건을 탓하지 말자”라는 멘트가 가슴에 와 닿았다.

나에게 딱 하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내일은 푸른 하늘’ KBS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매일 오후 6시~7시까지 방송한 이 프로그램은 친구이자 위안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으며 내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해 준 소중한 천사였다. 꽁꽁 숨겨진 마음을 세상과 소통해보려고 나의 처지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를 글로 표현해 청취자 참여란에 투고해 소통을 시도했다. 그렇게 방안에서의 생활이 15년을 넘어설 즈음 나의 딱한 사정을 안 듯 1997년 어느 봄날 한국혈우재단에서 향긋한 봄 내음과 함께 희망을 주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하루에 몇 시간씩 걸리는 불편한 교통편을 이용해 서울행 버스에 몸을 맡기고 살기위한 사투를 시작했다. 혈우병은 피가 응고되지 않는 인구 1만 명 중 한 명꼴로 발생하는 출혈성 희귀난치성질환이라 예전에는 25세 이전에 뇌출혈 등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희귀병이다. 나는 반복된 운동을 하거나 한곳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핏줄이 내 몸 어디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질병을 떠안고 살아가는 건 괴롭기만 했다.

요즘은 혈우재단 서울의원에서 한 달에 한 번 홍천 집을 방문해 외래진료로 간호서비스를 지원해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25년의 생을 덤으로 살고 있기에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다짐했다. 하루에 스스로 5개의 약물주사를 맞고 고통을 이겨내지만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 줄 수 있는 하루가 주어짐에 신께 감사의 기도 또한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어진 생이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나보다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과 가족이 그리운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지원군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하게 된 봉사가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그리고 수천만 원이 넘는 치료비에 몸이 아파도 병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의료보호 혜택을 받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자 봉사와 기부를 시작했다. 나와 같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돼 내가 느낀 감사와 삶의 의미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욕심을 낼수록 삶은 오히려 고행이 됩니다. 모든 고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 먼저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요즘 이 글을 머리맡에 붙여 놓고 산다. 살아갈수록 행복은 저 멀리, 저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곳곳에, 오히려 대단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일들 속에 있다는 걸 느낀다.

세상 모든 일에는 비용이 따른다. 나라에서 지원받는 장애인 활동 지원서비스나,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때도 내 몫의 비용을 치르게 되는데 내게 가장 소중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만하면 세상이 공평한 것도 같다. 나처럼 몸이 불편하고 밥이나 겨우 먹고 사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기 위한 비용마저 치러야 한다면 아마도 마음에 원망만 넘칠 것이다.

행복은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단순하게는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사에 거스르지 않고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처럼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으며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데는 많은 분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사랑이 큰 힘이 됐다. 그래서 더 감사한 마음으로 나 또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15년간 받아온 것은 정말 커다란 혜택이었다.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인 가정을 방문해 일상생활을 보조하고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가돌봄 서비스다. 만일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움직임에 있어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이고 지금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으며 새로워진 삶에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이라면 현재 장애인협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권익 신장과 복지 향상을 위해 앞장서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로 그들의 손과 발이 돼 더 많은 장애인 가족과 이웃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노력하며 행복을 찾고 있다. 또한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에게는 말벗이 돼드리고, 심부름도 해드리고, 나들이도 같이 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나도 뭐든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 느끼는 행복감이랄까. 부족한 나지만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뿌듯함을 항상 느끼며 산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가진 것을 나눌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하나를 내놓으면 그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 개, 스무 개가 돼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아마 봉사활동을 많이 해본 분들은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또한 봉사하며 세상에는 나보다 신체적, 경제적으로 연약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방에서 꼼짝 못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 장애에 대한 주위의 시선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 그들에게 대화로 다가서고, 위로와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노력하면서 이제 그들 모두가 나의 친구가 됐다. 나 또한 그동안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왔던 만큼 다른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며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싶다.

때로는 나도 몸이 불편하기에 그 일들이 힘들기도 하고, 피곤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동안 나도 많은 도움 덕분에 살아올 수 있었잖아”라는 마음으로 고단함을 이기고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나면 항상 잘했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내가 받은 혜택을 다른 어려운 이들과 나눌 수 있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선한 이웃,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삶에 자신감도 생겼다. 남을 도우며 오히려 내가 ‘보람’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처음엔 몸이 불편하기에 먹고 사는 일이 평생의 큰 숙제처럼 느껴져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 언젠가 내게도 행복이 오리라 단순히 믿었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은 몰랐던 것 같다. 만일 그걸 끝까지 몰랐다면 평생 절망으로 가슴앓이만 하는 인생이 될 뻔했다.

내 재산은 물려받은 소형 주공아파트 한 채가 전부다.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금액으로 살아가며,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지고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주사약을(혈액응고인자제제) 맞아야만 활동이 가능한 사람이다. 이렇게 넉넉하지도 않고 몸까지 불편하지만 나는 25년 간 세상이 알게 모르게 기부해왔다.

기부란 어떤 소기의 목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무 조건 없이 금전적 도움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통은 가진 것이 많고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나의 한 달 수입은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 노령연금으로 받는 100만 원 정도가 다 인데 이 중에서 늘 절반은 먼저 기부금으로 떼어놓고 나머지 절반으로 생활한다. 잘 먹고 살면서 돈을 쓰려고 들면 전부 나 자신에게만 써도 오히려 모자란 금액일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이 술, 담배 등으로 낭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꼭 써야할 곳에만 쓰니 절반의 금액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장애인 및 독거노인 가정과 사회복지시설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고, 장애인 가정을 비롯해 형편이 어려운 초・중・고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여러 후원을 하고 있다. 지금껏 그렇게 기부한 금액이 1억 원이 넘는다. 물론 매 월 내가 가진 것의 절반을 다른 사람에게 후원하기까지 망설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에 대한 감사로 시작할 수 있었고, 나눔의 기쁨을 느끼며 지속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해줄 수 있다는 뿌듯함과 하나를 주면 열 개의 보람이란 열매를 얻는 이 느낌은 봉사하는 분들은 백배 공감할 것이다.

기부하고 봉사하며 “나눌 수 있어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늘 생각한다. 이처럼 내가 받은 게 많은데 감사하게도 지역에서는 나를 기부천사라고 불러주신다. 이런 나의 작은 실천이 많은 이에게 울림이 돼 그 파장이 넓게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봉사현장이 좀 더 많은 사람으로 붐볐으면 좋겠다. 순수한 선행은 또 다른 선행을 낳는 법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가족여러분들 힘을 내시길 바란다.

신체가 장애지 마음마저 장애는 아니다.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데까지 움직이고 생활전선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희망과 꿈은 나이와도 상관없고 장애인에게나 비장애인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작은 꿈이 있다면 하늘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장애인 가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봉사로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더불어 장애라는 역경을 극복해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긍정적인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나는 일기장에 “내 휠체어 가득 사랑과 희망과 꿈을 싣고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리라”라고 쓰고 남은 인생을 외롭고, 소외되고, 병든 이웃과 장애인을 위해 지원군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