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하늘이 높고 푸르른 날입니다. 얼마전 가을이 다 도착하기도 전에 코스모스가 천지를 덮더니 제법 쌀쌀함도

늦껴지기도 합니다. 계절의 어원이 새로 본다고 해서 '봄'이고 열매가 열린다고 해서 '여름'이라고 합니다. 또한

갈아 입는다고 해서 '가을'이며 겨우 산다고 해서 '겨울'이라고 합니다.

가을이 온다고 할 때 어느 시인은 "매미 울음소리가 왠지 녹슬었다고 생각 될 때 가을은 온다. 냇물 소리가 귓가에서

차가워질 때 가을은 온다. 무심코 바라보던 저수지의 물빛이 문득 눈에 시리게 들어올 때 가을은 온다. 라디오에서

듣는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를 혼자 배워보고 싶을 때 가을은 온다"고 했습니다. 혈우가족 여러분은 어느때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는지요?

나는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계절의 변화를 느낌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개구쟁이였던 나는 오징어 놀이, 나이 먹기,

비석치기, 땅 따먹기, 기마전 등 온갖 놀이와 함께 산과 들로 해지는 줄 모르고 천박지축 싸돌아 다녔습니다. 산을 개간

해 만든 신생 초등학교였던 모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데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놀이터이자 별천

지였습니다.

운동장 옆 산속에서 봄에는 온갖 꽃들의 함박 웃음에 취하고 여름에는 산딸기, 정금 열매 등으로 허기을 달래며 소나무

그늘 밑 제상에서 늘어지게 자기도 했습니다. 초가을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워메! 단풍 들겠네' 싯구의 느낌을 창문 너머

알아가고 늦가을 어느날은 '만산에 홍엽'이란 표현의 정수를 바로 앞에서 만끽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겨울에는 노루

같은 산짐승도 가까이에서 보았고 산토끼 몰이로 햐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순환을

몸으로 배운 유년 시절의 기억은 계절의 변화에 본능적 촉수를 일깨우기도 할 뿐더러 살아가는데 '알싸'한 청량감을 주기

도 합니다. 한가지 단점은 그 촉이 매년 초가을 감기를 동반 한다는 거~.ㅋㅋ

그래서 일 것 입니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처녀작이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인 이유가. 그 시절의 삶, 감정, 그리고 생각이

현재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처럼 아픈 몸의 기억은 어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8월의 크리

스마스>에서 시한부 인생의 사진관집 아들 정원(한석규)이 다림(심은하)과 아픈 사랑을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대사처럼 지금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를 관점이라고 합니다. 어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듯 상황도 마찬지라 생각합니다.

두 귀가  다 인조고막인 고은 시인은 한쪽 귀는 아예 들리지 않고 다른 한쪽은 보청기에 의지해 가까스로 듣는다고 합니다. 시인

은 말합니다. "생리적 결핍이 심리적 풍요의 원천이 되었다"고. 그런면에서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나에게 '풍요의 원천'

입니다. 아프지만 숭고한 진실을 받아 들입니다.

오늘은 '시인'을 많이 이야기 했으니 마음에 담아둔 시 한편 남겨두고 갑니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를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